성경의 난제들[16]. 세상창조와 사람의 중생 (2009/11/08)
창세기 2 : 1 - 7
지금까지 계속되는 사람의 물음이 있다면, 이 세상 즉 사람은 누구가 창조한 것인가? 아니면,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물음은 곧 창조주, 또는 신에 관한 것이고, 후자의 물음은 이른바 진화론자들의 주장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물음들은 철학자들의 물음은 물론이고, 몇몇 종교를 제외하면,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물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교회나 사람들은 그 물음의 답을 성경에서 찾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대답을 확실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 대답을 주지 않고 있다고 하면, 특히 창세기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많은 교회나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저에게 돌멩이를 퍼부을 것입니다. 사실 성경, 또는 창세기의 세상창조에 관한 장절들을 깊은 생각을 가지고 읽는다면, 제가 한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존재하는 창조의 결과들에게서 우리는 수많은 모순점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창조기록은 무엇을 뜻하는 내용일까요? 그 결론을 먼저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사람의 중생에 관한 것이고, 또한 중생과정을 그려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티끌 같은 존재(=지옥적인 사람)가 종국에 주님의 생명의 기운을 받아서, 그 사람이 생명체 또는 생령(生靈)이 되는 과정을 엿새의 과정을 그려보여 주고 있고, 또한 그런 내용과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요, 성경말씀의 진정한 뜻이고 가르침이라는 것은 성경 전편에 두루 흐르는 맥락에서 능히 알 수 있고, 또한 종국에는 주님의 강림에서 잘 입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나 사람들은 주님의 강림을 이른바 노아홍수에서와 같이 멸망에서 해설하고, 또 그 의미를 찾고 있지만, 주님의 강림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듯이,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온 것이지,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것이 그 뜻이라면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필요도 없었고, 또한 십자가나 부활의 역사를 단행하실 목적도, 이유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주님께서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야곱아,너를 창조하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나는 주, 너의 하나님, 너의 구원자다.......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이사야 43 : 1 - 21).
그리고 이어서 주님은 눈물겨운 말씀으로 이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고,
너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너희를 품고 다녔다.
너희가 늙을 때까지 내가 너희를 안고 다니고,
너희가 백발이 될 때까지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다.
내가 너희를 지었으니,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고, 안고 다니겠고,
또 구원하여 주겠다(이사야 46 : 3 - 5).
시편서는 재창조, 즉 사람의 중생이나 구원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먹이를 주시면, 그들은 받아 먹고,
주께서 공급하여 주시면, 그들은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립니다.
그러나 주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 하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어 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께서 주의 영 (=주의 숨)을 불어 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께서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시편 104 : 27 - 30).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오늘날 수많은 교회는 이른바 “금단의 열매를 따 먹었기 때문에, 그 원죄 때문에, 인류는 멸망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치고, 그리고 그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피 공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밝히 알아야 할 사실은 “금단의 열매를 따 먹는 일”(=선악과를 따 먹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저 에덴 동산 가운데 있는 이른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마치 우리가 과일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듯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주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그런 동산도, 그런 나무도 없었고, 또한 그런 열매 역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적인 예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외에 ‘생명나무’도 있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2 : 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는다는 말은 사람이 자신의 오관(五官)으로 믿음에 속한, 이른바 신비스러운 것을, 또는 하늘나라에 속한 것을 판단하고, 단정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의 잣대(=오관. 이성. 총명. 지식)를 가지고 주님의 창조와 그리고 창조의 주제자이신 주님을 판별하고, 단정하는 짓입니다. 그 결과는, 성경말씀이 선포하고 있듯이,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에서 잘 읽고 있듯이, 사람이 주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주님을 본다는 것은 곧 사람의 죽음을 뜻합니다. 이 사실을 출애굽기서는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출애굽 33 : 20)고 선포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하나님)께서 인간의 눈에 보이시는 그런 가시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도 되지만, 그 보다 깊은 뜻은 사람의 것으로 주님을 헤아리면 그것 자체가 영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 곧 주님께 지음을 받은 사람, 생명이 아니고, 주님의 생명을 받는 그릇인 사람은, 그 창조목적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우리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주님에게 다시 드리는 것입니다. 이 되돌려드리는 일이 예배이고, 감사이고, 또한 우리 사람의 중생이요, 결과적으로는 구원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놀라운 사실을 주님 신랑과 교회 신부의 혼인으로 표현하였고, 요한복음서는 여러 곳에서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우리안에 사시는 것”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창조는 곧 재창조, 즉 우리의 중생이요, 종국에는 우리의 구원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