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종교회의
기독교의 교리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대부분의 신자들은 기독교의 교리들이 초대교회가 등장한 이후, 애초부터 기독교의 교리가 형성된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성경적이지 않은 삼위일체의 교리, 기독교의 기념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정의를 내릴것인가하는 그리스도론, 천주교에서 행하는 유아세례와 마리아숭배 등은 격렬한 논쟁중에 종교회의에서 그 당시의 시대상황에 맞추어서 결정내려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교리는 수많은 오류와 문제점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논쟁은 종교회의에서 끝나지 않았으며, 결국 동로마 교회와 로마카톨릭이 서로를 이단으로 파문해버린뒤 결별하고, 끝내 로마카톨릭이 십자군원정을 통해서 이슬람교인과 함께 동로마 교회를 괴멸시켜버린 역사가 있다.
기독교의 교리를 형성시켰던 종교회의의 부조리와 숨겨진 역사적 비화를 탐구해 보도록 하자.
▶콘스탄티누스는 미트라의 숭배자였다
콘스탄티누스를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교황이자, 기독교를 공인하여 로마를 기독교화 시키는데 앞장선 인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그가 크리스트교를 공인했다는 이유와, 그의 사후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는 점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 숭배자였고, 그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수없이 변질되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또한 그는 자신의 아들 '그리스프스'와 장인 '미키시미안'을 살해하였고 그의 처 '파우스트'를 끓는 열탕 속에 쳐 넣어 죽이기도 하였으며, 음식물을 도둑질한 노예의 입에 납을 녹여 붓는 형벌과, 가난한 자는 자식을 팔아도 된다는 법을 정하기까지 했던 폭군이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러한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 종교회의는 하나님의 결정이다."고 세상에 선포한 공적이 있다하여 카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서된것 뿐이다.
콘스탄티누스가 등장할 당시는 로마의 황제가 6명이나 되었다.
로마의 황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식의 강력한 황제가 아니라, 황제는 프리켑스(princeps=제 1의시민)또는 가이사(caesar)이라 불렸으며, 민주주의와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인의 자유로운 사상때문에 시이저마저도 황제가 되려다가 로마시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화파에게 암살 당하는기 까지 했다.
결국 시이저의 양아들 옥타비우스는 황제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프리켑스라는 명칭을 썼다.[옥타비우스는 그 명칭보다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존엄한자)라는 명칭을 들었음]
그후 폭군으로 알려진 칼리귤라(=가이우스)와 네로황제가 암살당한후, 군인황제시대인 서기69년에는 한해동안 무려4명의 황제가 등장하기도 했었을만큼 황제의 권위와 권력세습체계가 미약했으며, 누구든 힘있는 자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중 6명의 황제중에 프랑스와 브리튼의 로마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부제는 마지막 라이벌인 막센티우스와의 운명을 건 물비안다리의 전투를 하기전 꿈속에 십자가가 보이면서 군사들의 방패에 기독교의 상징을 표기한 χρ를 장식하면 승리할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
그는 그 전투에서 승리한후 그동안 핍박받았던 크리스트교를 서기312년 공인하였다고하며,그의 사후 서기 392년에 크리스트교는 로마의 국교가 된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즉 미트라의 숭배자였다.
그는 평생동안 태양신 종교의 고위성직자로 있었으며, 그의 통치하에서의 로마의 국교는 태양신 숭배였다.
실지로 그의 통치는 태양의 제위(帝位)라고 불리웠으며, 태양신 "솔 인빅투스"(로마식 미트라)는 당시 제국국기는 물론 화폐에 까지 등장하였으며,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새기도록 했다.
심지어 그의 기념축전에서는 거대한 기둥탑을 세워, 미트라신과 자신의 모습을 조각케 했다고한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죽음에 임박한후, 즉 사망하기전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즉, 그가 로마를 통치하고 있을 당시,그리고 니케아 종교회의를 개최할때까지만 해도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를 실패한 메시아로 보고, 그 자신을 진정한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의 이런 견해는 유명한 주교인 유세비우스의 다음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마침내 예수가 아닌 콘스탄틴에게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실패한 메시아이고 콘스탄틴이 참메시아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곳곳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의 원조를 원했고, 따라서 권력을 놓고 다투던 여러병의 황제들중에 어느누군가와 결탁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전히 협상,비지니스에 불과하다.
A. Kee의 견해에 따르면 다신을 믿으면서 민주주의적으로 자유분방한 로마인들(그래서 황제가 여러명이나 등장할 수가 있었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대안으로 일리리안(Illyrian)은 태양 숭배를 생각했는데, 콘스탄틴도 처음에는 그와 동일한 목표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았다.
즉, 그의 태양신숭배는 유일신 사상으로 로마인들을 통합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A. Kee / Constantine versus Christ / London / 1982.]
헨리 채드윅은 그의 저서 '초대 교회사'에서 콘스탄티누스에 관하여 이렇게 언급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무적 태양을 숭배하였다... 그의 개종을 내적인 은혜의 체험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그것은 군사적인 문제였다...크리스트교 교리에 대한 그의 이해는 결코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Henry Chadwick / 서영일 역 / 초대교회사(The Early Church) / 종교개혁사]
▶종교회의
1) 제1차 종교회의(니케아)
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니케아에서 소집한 최초의 종교회의로, 324년에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그의 정적인 리키니우스를 이기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 교회는 예수의 신성(神性)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분열의 위기에 놓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분쟁이 국가적 차원에서 분열이 조장될 것을 걱정하여 황제 자신의 주선으로 그 당시 황제의 거주지인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케 했는데, 이 회의의 동기는 아리우스 논쟁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派)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고기 위함이었다.
이 회의를 통해서 예수는 투표에 의하여 신(神)이 되어 버렸는데, 기존의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한 점은 11장의 "삼위일체설의 허구성"에서 신약의 기자들도 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수와 여호와를 동등하지 못하게 기록했음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초대교회사람들에게 예수는 신의 독생자로 모든 창조물중에 으뜸가는 존재요, 모든선지자중에 으뜸인 인간으로, 신과 인간의 중간에 중보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속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 기독교는 차츰 미트라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미트라의 성삼위일체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정통파 아리우스파와 미트라의 삼위일체설을 받아들인 아타나시우스파로 갈려지게 된다.
미트라의 숭배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종교회의를 개최하면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하려고 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세례도 받지않은 상태로 종교회의를 사회하면서 공포적인 분위기로 회의를 주도해갔다.
"교회의 머리(콘스탄틴)가 나타날 때(6월 14일), 그는 '하늘에서 내려 온 하나님의 사자로 금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미와 위엄으로 충만한 영광스러운 모습'이었다(에스겔 28장 인용). '제왕의 자주색 옷을 입었고(요한계시록 17:4), 머리에 금 띠를 둘렀으며, 그의 붉은 안색과 내리깐 눈은 그의 옷의 보석들에 반사되었고, 그의 허리에는 제왕의 칼과 목자의 지팡이(스카랴 11:17)가 있었다.'"
위의 말은 당시 회의중에 나왔던 말이다.
참석자들은 콘스탄티누스에게 성경구절로써 온갖 아첨을 하고 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모인사람중 몇명을 추방하고 종교회의의 다수 규칙을 따르지 않는자는 누구나 죽이라고하고, 교회의 불일치는 제국의 분열을 가져올 것이므로 연합하지 않는자는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 회의를 공포적인 분위기로 주도해 갔다.
이 회의의 참석자는 318명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이들을 감독들이라고 불렀는데,그들은 각자 장로 두 명과 수행원 셋을 거느리고 니케아에 모였다.
감독들중에서 가장 눈여겨볼만한 인물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이다.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신(神)이 무(無)에서 창조한 존재로,인간의 영(靈) 대신에 로고스가 들어간 존재라고 말했으며,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는 무(無)에서 창조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전의 영원에서 신(神)이 창조한 존재로 본질은 신(神)이 아니나,신과 비슷한(homoi) 존재라고 주장했다.[성경통신대학 제3권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교육부 / 1992]
그러나 그들이 제출한 신경(信經)은 폐기되고,황제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채택되어 '니케아신경’(Nicaenum)이 공포되었다.
이 신경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는 ‘호우시우스’인데 그 의미는 성자(聖子)는 성부(聖父)와 본질이 하나라는 것이다.
이 말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코르도바의 오시우스(Ossius von Cordoba)의 말을 빌려 한 말이다.
즉,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라는 것의 니케아신경이 공포되고, 이 회의에서 예수는 투표에 의하여 인간에서 신이 되었으며,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破門), 유형당했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은 이때의 투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토론을 적극적으로 지도하였으며...공의회가 발의한 신조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라고 표현한 결정적인 공식 문을 직접 제안하였다... 주교들은 황제에게 위압되어 단지 두명만 제외하고 신조에 서명하였는데,그들 중 다수는 자신들의 견해와 매우 달리 행동한 것이다."
또한 이 회의를 통해서 많은 이교도적인 종교의식이 기독교에 도입되었다.
우선, 주목할만한 것은 부활절의 시기였는데, 당시 지중해 국가에서 봄의 여신축제(동시에 미트라의 부활절)시기를 부활절로 결정지었다.
이밖에도, 부활절 계란이나 결혼 반지, 종교적인 행사, 촛불을 켜는 것, 까운 복장의 성가대, 죽은 자들에 대한 기도, 예배 도구로 쓰인 나무 토막이나 천조각, 방에 성수(聖水)를 뿌리는 것,등의 의식이 도입되었다.
2) 제2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 작은 종교회의
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가 소집, 안티오키아의 주교 멜리티우스가 주재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이 회의에는 모두 150명이 참석했으며, 이 회의에서 삼위일체의 교의(敎義)에 관하여 논의되었으며, 특히 성령의 신성함을 옹호하였으며,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공의회의 합의를 공인하였다.
첫 번째 회의에서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해진후, 2차회의에서는 여기에 성령이 끼워져서 삼위일체가 결정된 것이다.
또한 이미 개최된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주장이 배척되었으나, 그뒤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서는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으므로,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필요 했으며,이 회의에서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아리우스파 (Arianism)'항목]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오도시우스 장군의 아들로, 서로마제국의 정제(正帝) 그라티아누스에 의하여 동로마의 정제로 선임되어 사르마티아인과 서고트족을 토벌하였다.
서제(西帝)가 살해된 후 서방의 군대 실력자와 제위참칭자(帝位僭稱者)들을 쳐부수고 전제국을 수중에 넣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 분할 통치되고 있던 제국을 재통일하였다(394).
그러나 그는 죽기 직전 제국을 둘로 나누어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계승시켰다.
380년에는 아타나시우스파의 가르침을 정통파 신앙으로 정하였다
테오도시우스는 392년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아서 미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로부터 "대제"라는 호칭을 받았으나, 실상은 콘스탄티누스를 뺨치는 폭군이었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에게 명하여 이교도를 압박하고 이방종교의 신전을 파괴하고, 신전령(神殿領)을 몰수하였으며, 394년에는 올림픽 경기를 금지시켰다.
또, 빈민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부담케 하고, 빈민들을 숨겨주거나 했을 경우 마을 주민 전체를 학살시키기도 했었으며, 관리들에게는 고문을 예사로 자행시켰다.
390년에는 데살로니카시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시민 7천명이 대학살되기도 했다.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나,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은 황제 모두 내노라하는 폭군이었던 셈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두 번째 종교회의가 끝난후에도 간헐적으로, 카르타고 종교회의(The Council of Carthago, 401), [415년 멜라 종교회의(The Council of Mela)에서], 누미디아 종교회의(A.D.415)등이 개최되기도 했다.
이 작은 종교회의에서는 유아세례가 공인되었다.
천주교에서 행하는 비성경적인 유아세례는 기독교의 원죄론을 정립한 어거스틴의 작품이었다.
216년, 터툴리안은 성인들만 침례에 합당한 대상이라고 하였고, 96년경에 초대교부였던 클레멘트(Clement)는 침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받고, 그가 침례를 받을만한지 심사하였다고 하며 유아세례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스우스(Dionysius)역시 신앙고백이 있은 후에 침례를 베풀었다.
쁘와띠에의 힐라리(Hilary), 아타나시우스, 달마티아의 제롬, 가이사랴의 바실도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 한 아무에게도 침례를 베풀지 않았다.
크리소스톰, 나지안젠의 그레고리, 밀란의 암브로스도 같은 말을 했다.
역사가들은 90-300년 사이에는 아무도 유아 침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보는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이에 대한 교리들을 가르친 점이 주목된다.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오리겐에게 유아세례를 인정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오차아드(Orchard)는 유아세례가 "카톨릭" 교리로 처음 나타난 것이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의 글에서라고 하는데, 그는 오리겐 처럼 외경을 담은 "칠십인역"이 영감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누미디아 종교회의(A.D.415)에서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저주하였다.
그 이유는 도나티스트(Donatists)들이 성인에게 다시 침례(재침례)를 베풀 때에 그들은 처음의 세례(유아세례)가 의미 없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유아세례가 성경적이며 "성인침례"는 유아 때 이미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이단적이라고 주장을 펴나갔으며, 후에 개최된 카르타고 종교회의(The Council of Carthago, 401)는 어거스틴을 지지하여 그의 궤변을 "정통" 교리로 인정하였다.
급기야 A.D.413년에 데오도시우스와 호노리우스 황제는 유아세례를 받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나 재침례를 받는 성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도록 하기조차 하였다.
후에 415년 멜라 종교회의(The Council of Mela), 789년 샤를마뉴(Charlemagne)는 유아세례를 국법에 규정하기조차 하였다.
유아세례라는 것 자체가 모슨일 수밖에 없다.
많은 수의 '신자들'이 아기를 교회에 데려오지 않으면 죽음이나 파문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기를 데려와야 했으며, 구원이 무엇인지 물을 뿌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는 아기들에게 자각능력이 형성되기도 전에 기독교인으로 못을 박아버리는 것이다.
3) 제3차 종교회의(에페소스)
A.D 431년에 에페소스에서의 제3차 종교회의로, 예수의 품격(品格)과 마리아숭배를 둘러싼 논란이 신학문제의 초점이 되어 테오도시우스 2세가 소집한 3차 공의회이다.
이회의에는 250명이 참석했는데, 에베소는 오래 전부터 다이아나를 동정녀와 어머니 여신으로 경배해온 도시였으며, 지금도 아르테미스를 숭배했던 신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안티오키아학파 출신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總大主敎)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학파의 입장에서 마리아에 대한 ‘신(神)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정하였다.
반면에, 예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학파가 이에 이견을 제시하자, 네스토리우스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강요하여 이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 시리아의 주교들, 교황 셀레스티누스 1세측의 대표자들과, 네스토리우스의 적수인 에페소스의 주교 멤논의 지지를 받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의 적수들은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이 회의에 도착하기도 전에 고의적으로 회의가 개회되었으며, 여기에서 마리아를 신(神)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이 회의의 소집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2세와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3세였지만, 두 황제는 모두 누이와 황후, 어머니들에 의하여 섭정이 이루어졌던 무기력한 허수아비왕으로, 회의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들의 방관아래 네스토리우스파는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했고,회의는 불공정하게 진행되었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직에서 해임되고, 파문(破門)을 당하였으며 그의 교구는 단죄되었다.
이 회의에서 패배한 네스토리우스파는 로마에서 박해를 받은후, 동방으로 건너가 경교가 되었다.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은 후에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되어 국법이 되기도 했다.
4) 제4차 종교회의(칼케돈)
A.D 451년에 칼케돈에서 열린 제4차 종교회의로 참석자는 500~600명정도로 추측된다.
이 회의의 개최자는 형식상으로 비잔틴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소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학자 에드알트 슈바르츠의 주장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2세가 죽은 뒤, 마르키아누스를 남편으로 삼은 부르케리아가 각 교회의 의사에 반하여 압력적으로 종교회의를 소집, 그녀가 주도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칼케돈에서 열린 4차회의에서 교황 레오1세는 '도그마 편지'에서 예수의 이중성(二重性)에 대한 신조를 도입시켰다.
이 회의에서 예수라고 하는 인격 안에 신과 인간의 성격이 불가분적으로 합치되어 있는 것으로 결정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칼케돈 신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 이 이중성은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다.
니케아공의회(325) 및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에서 삼위일체의 교리가 결정된 후에도, 그리스도는 그 본질에 있어 무엇인가를 놓고 논쟁이 계속 이루어졌는데,이회의에서 결정이 나게 된것이다.
이 회의에서 삼위일체론을 믿었지만, 예수의 인성까지도 신성에 속한 것이라 주장하여, 예수의 몸은 우리의 몸과 같지 않고, 그의 육체도 신성에 속한 단성설을 믿은 유티키아파가 단죄당했다.
그들이 주장했던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m)이란, 성육신(成肉身)한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완전히 결합 또는 융합하여 단일의 성(性)을 이룬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론(論)이다.
이러한 단성설은 라오디게이아의 아폴리나리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등, 이른바 알렉산드리아학파 사람들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그리고 에페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설(說)이 배척된 뒤, 에우티케스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다.
교회는 칼케돈공의회(451)에서 이러한 단성설을 부정하고, 성육신의 그리스도는 신인양성 일인격(神人兩性一人格)이라는 양성설(兩性說)을 교의로 채택하였다.
이 회의에서 예수의 인성과 육신까지 신이었다는 단성설이 배척되었지만, 복음서의 마지막에는 부활한 예수가 육신채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단성설도 타당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리고 이회의에서 로마 교황의 탄생되었으며, 교황에 의해서 교리가 통일될수 있게 되었다.
5) 제5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553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1세가 소집한 회의로, 156명의 동방정교회의 주교(主敎)들만 참석하였다.
당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1세는 청색,녹색의 서커스당이 반기를 들었던 "니카의 난"때 황제자리를 되찾아 주었던 그의 아내인 테오도라가 공동통치자로 그녀에 의해서 회의가 주도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유스티아누스가 이미 교서, 법률로 먼저 공포해 놓았던 것이 의제로 채택되어 회의는 형식적인것일 뿐이엇다.
따라서 5차종교회의는 "갈채 회의"라는 이름으로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4차회의에서 예수에대한 정의가 내려졌지만, 반대하는 그리스도의 단성설 지지자가 아직도 많았다.
이 회의를 통해 그리스도의 단성설(單性說)로 대표되는 그리스적 신학과, 그리스도의 양성설과의 조화를 찾고자 로마측에 양보를 강요했으나, 팽팽히 대립함으로써 결국은 교회분열을 가져왔다.
이 회의에서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신의 도성"(De Civitate)을 세상통치를 위한 이론으로 결정짓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이 이론의 핵심은 교회가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기독교의 원죄론을 정립하였던 어거스틴이라는 자는 로마정부에 대단한 아첨꾼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아세례를 주장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을 태아나자마자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기독교국가였던 로마에 충성케하고,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는것(=기독교국가, 즉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는것)이 하나님의 왕국이 이땅에 실현되는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한 그는 대단한 아첨꾼이자, 수완가가 아닐까?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교리적인 사안이 논의되었다.
인류의 타락이 누구의 죄인가하는 문제이다.
만일 여호와가 전지전능한 신이었다면 아담과 이브의 거역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한 신은 어째서 전능하신 신은 타락을 미리 계산에 넣고 있었던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천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천사 루시퍼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사탄이 타락한 천사라는 관념은 유대교의 또다른 창세기인 '하가다'서에서도 알수가 있다.
'하가다'서에서는 신이 아담을 창조하자, 천사들이 아담을 시기하였다고 한다.
천사들은 아담을 불로 죽이고 싶었지만, 여호와가 그것을 막아 주었다.
그중에 '사탄'이라는 12장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아담을 가장 시기 하였다고 한다.(다른 천사들은 날개가 6장이었음)
천사 미카엘은 신의 형상을 한 아담에게 경배하였으나, 사탄은 그것을 거부하여 천사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천상에서 쫗겨났다고 한다.(숨겨진 성서,'하가다'서)
위와같이 사탄이 타락한 천사이고, 이것이 인간을 죄짓게 했다는 외경적인 사상이 이 회의에서 그대로 주입되어 버렸다.
그러나 무한과,영생,행복이 가득한 완전함과 전지전능함 세계인 천국의 천사가 창조자인 신에게 거역했다는 것 부터가 어불성설이다.
결국 천국이나, 천사라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닌, 불완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겟는가?
여호와는 전지전능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형이 인류의 죄를 대속한 것이라는 개념은 이 회의에서 결정을 짓게 되었다.
즉, 예수가 피흘리고 죽은 것을, 동물의 제물을 바치는 구약적 제사와 연관지어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제사의 의미로 결정지은 것이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신을 자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입다의 딸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사사기 11장)정도의 고대 화산신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미개한 의식을 아름답게 치장한것에 불과하다.
뉴저지, Newark의 감독파 교구의 독립 주교인 죤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는 자신의 저서인 '어째서 기독교가 변하거나 죽어야만 하는가'(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에서, 스퐁은 소멸하지 않기 위해 기독교가 반드시 수용해야만 하는 '열 두 주제들' 을 제안했다.
여섯 번째 것은 이것이다. “
십자가가 세상의 죄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견해는 반드시 사라져야만 할, 원시적인 개념에 기반을 둔 하느님에 대한 야만적 사고이다.”
인간 탐구(Human Quest)의 보다 최근 기사에서, 그는 이 주제에 대한 항변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나로서는,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그것을 요구했다고 일컬어지는 하느님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고대적으로 해석하는 야만적인 성질을 노출시키고 기독교에서 이러한 영적인 잔악한 행위를 제거하지 않으면, 기독교에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현대의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인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을 바라는 하느님을 매력적으로 볼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만일 기독교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의미를 필요로 한다면, 우선, 나부터도 더 이상 이 오래된 믿음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특성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수동적인 반대는 절대 효과가 없을 것이다. 대신, 이 생각은 공격적으로 제거되어야 하는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나 보다 매력적인 것은 그 어느 것도 결코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회가 새롭고 강력한 개혁을 필요로 하며,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들을 점검하고 재구성할 때까지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라고 믿는다"[“Reforming Christology: He Did Not Die for My Sins!” 1999년 11/12월, p.7]
어쨌든 이 종교회의 이후에 유스티아누스는 교황 비기리우스에게 이단 소탕 법령를 내린다.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부인하는 자는 이단자로 낙인을 찍어 사형을 행했으며, 세습권도 정지당했다.
유스티아누스의 명령에 의해 로마 관리들은 큰무리로 떼지어 다니면서 이단자들을 색출해 서 강제적으로 세례를 받게 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유스티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카톨릭의 성인 품에 올려져 있다.
6) 제6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
680∼681년 동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가 소집했으며,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을 배척하고 로마카톨릭 교회와 화해하였으며 호노리우스 교황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단성설은 완전히 배척받게 되었다.
7) 제7차 공의회(니케아)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공의회로, 당시 섭정(攝政)이던 동로마제국의 황후 이레네 2세가 총대주교 타라시우스를 책동하여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상(聖畵像) 숭배, 유물숭배 (유물을 제시하지 않으면 어떤 주교도 교회건물을 헌당할 수 없게 함), 성자숭배, 죽은 성도와 순교자들에 대한 기도가 공인, 남녀공주수도원(男女共住修道院)의 금지 등에 관한 조규(條規) 20개 조가 의결되었다.
그러나 성화상에 관한 교리는 서유럽에서 오해를 불러일으켜 얼마 동안 그 승인이 보류되었다.
8) 제8차 공의회(콘스탄티노플)
869∼870년 이콘[聖畵像] 논쟁을 둘러싼 동·서 교회의 대립을 배경으로 한 공의회이다.
교황 아드리아누스 2세는 동·서 양교회 분리의 요인을 조성한 포티우스 주교를 파문하였다.
또한 불가리아인에 대한 동로마제국의 권리를 배격하고, 로마가톨릭 교회로의 귀속을 확인하였다.
교회합동을 재현한 공의회였으나 그것은 일시적이었다.
▶그리스도론
예수는 인간인가 신인가?
이 문제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예수가 신이라고 투표로 결정나기 전까지 수많은 논란을 야기 시켰으며, 그 논란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도론(Christology)의 중심 문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서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결합 관계에 대한 논의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인 하느님과 함께 영원부터 선재(先在)한 ‘하느님의 독생자’(요한 1:18)이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세상에 온 자’(빌립 2:6∼11, 요한 1:14)라고 말한다.
교회는 이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이며, 참 사람(vere Deus, vere homo)’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론의 정통적 교의이다.
그 근본은 ‘한 인격 안에서의 신인 양성(神人兩性)’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통적 교의가 확립될 때까지는 많은 단계를 거쳐야만 하였다.
사도후교부(使徒後敎父:Apostolic Fathers) 중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선재성을 명확히 한 사람은 이그나티우스이다.
변증가들은 그리스도가 시간적 시작을 가지기 때문에 아버지인 신과 동등한 위격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보다 낮은 위격에 있는 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를 신의 ‘말씀(로고스)’의 성육(成肉)으로 생각한 사람은 2세기의 이레나에우스이다.
3세기에 들어와 오리게네스는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속하는’ 자라고 생각하였지만, 아버지로부터의 아들의 출생을 ‘영원의 출생(generatio aeterna)’으로 봄으로써 하나의 난문제를 타개하였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였다’는 것은 출생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출생한 때로부터 시간적 시작이 있게 되면 아들은 영원자인 하느님이라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의 ‘영원의 출생’이라는 생각은 이러한 점을 해결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여 그리스도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본격적인 그리스도론 논쟁은 ‘일위설(一位說:monarchianism)’의 발생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일위설은, 진정한 신은 여호와뿐이라고 주장, 삼위일체를 부정하였으며, 아들인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구별하여 하나님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 일위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
① 동력적 일위설(動力的一位說:dynamic monarchianism)-사모사타의 바울로가 주장하였다. 하느님은 아버지인 하느님 한 분뿐이며, 그리스도는 인간이었는데, 아버지인 하느님으로부터 영적 동력을 받아서 점차로 높임을 받아 하느님이 되었다고 해석한다.
이 설은 후에 나타난 아리우스설(說)과 결합되었다.
② 양태적 일위설(樣態的一位說:modalistic monarchianism)-그 대표자는 노에투스와 사벨리우스이다.
하느님은 아버지인 하느님 한 분뿐이며, 아들인 하느님은 아버지인 하느님의 양태(樣態:modus)에 불과한 것으로 독립된 고유의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고난을 받고, 죽은 일은 곧 아버지인 하느님이 탄생하고, 고난받고, 죽은 일과 같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이 설을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patripassianism)’이라고도 한다. 4세기에 들어와 아리우스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아들된 자이기 때문에 탄생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는 시간적 시작이 있는 피조물이지 하느님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325년 니케아공의회(公議會)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와의 논쟁에서, 아들인 그리스도는 아버지인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한다(homousios)”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니케아신조(信條)>에 채택, 정통설이 되었다.
그 후 5세기에 들어와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가 가진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구별을 강조한 나머지, 한 인격에 있어서의 통일성을 위태롭게 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에우티케스는 신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강력히 강조하면서 양성(兩性)의 혼합을 주장하기에 이르러, 인성의 고유성을 해소해 버리고 인성을 신성에 흡수해 버리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고 나선 사람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키릴로스이다.
451년에 열린 칼케돈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참하느님이며, 참사람’임을 고백하여 신인 양성은 '혼합되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중세기에는 그리스도론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으나 종교개혁기에 들어서면서 성찬논쟁(聖餐論爭)을 계기로 또다시 그리스도론 논쟁이 일어났다.
루터의 주장은 성찬으로 받는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재(實在)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전제로 하여 그리스도의 신체가 편재성(遍在性)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루터는 편재성이라는 신성의 속성이 인성에도 적용된다는 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을 ‘속성(屬性)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라고 한다.
이에 반해서 칼뱅은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강조하고 ‘속성의 교류’설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루터와 칼뱅의 논쟁은 강조점의 차이를 나타내는 데 머물렀을 뿐, 그 어느 쪽도 상대방을 이단시한 것은 아니었다.
이상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정의 할것인가에 대한 논란을 추려 보았다.
▶십자군원정에 의한 아리우스파의 괴멸
삼위일체설을 부인했던 아리우스(Arius)[250?~336?]는 리비아 출생으로 안티오키아에서 신학을 배우고 젊었을 때 메리티오스의 교회분열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파문(破門)당했으나, 후에 사면을 받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司祭)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司祭)였으나, 스승 루키아노스의 설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의 피조성(被造性)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321년 알렉산드로스 주교(主敎)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또 파문당하고 친구인 니코메디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스에게로 피신하였다.
그 곳에서도 다시 자기 주장을 펴다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논쟁에 패하고 정식 추방당하여 일리리쿰으로 유배되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의 세 위격(位格)은 대등하며,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 신이되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의 양자(養子)로 선택받은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니케아 공의회(325)에서는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나, 그 후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하여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 아래서는 전 로마 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격(嚴格)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난 데다 황제의 죽음(361)까지 겹치자 급속도로 몰락하였다.
제1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는 이른바 니케아 신경(信經)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후로도 아리우스파는 제국의 북쪽 게르만인(人)들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인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지위를 얻었다.
종교란 승자의 정신적 먹이이다.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한뒤, 로마황제에 대한 아첨꾼들인 그들은 두 번다시 아리우스의 정통파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는 적그리스도파라는 극소수 사도들의 이론으로 못을 박아 로마에서 추방했다.
하지만, 오히려 아리우스파에 비하여 로마의 기독교가 정통성과 권위가 아리우스파에 미치지 못했으며, 아리우스파는 동로마교회와 게르만족의 땅 서고트족이나,반달족등에서 득세하였고, 예루살렘과 레바논까지 세력을 펼친 강력한 세력이었다.
여러분께선 십자군 전쟁의 이유를 성지 탈환이라고 알고계신 분들이 많이 계신데, 십자군전쟁에 원인은 오늘날 여러 가지로 요인이 있다.
우선 십자군전쟁은 교황의 권위와 왕들이 왕권을 신장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이라는 점과 함께 로마 교황청의 그리스정교회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원래 로마 카톨릭은 동로마 교회에 비해서 권위가 많이 부족했고, 세력을 얻지 못했다.
서로마의 경우, 그들의 민족 자체가 초기의 로마인들이 아닌 게르만 민족으로 대체 되었다.
그러다가 프랑크왕국의 클로비스왕이 로마 교회와 계약을 맺고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한이후 로마교회는 유럽지역에 세력을 넓혀 갔다.
클로비스왕은 왕권의 정당성을 보장받았고, 로마카톨릭은 자신의 세력을 널리 전파할수 있다는 점에서 클로비스왕의 개종은 일종의 계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야만적이었던 당시 게르만 민족은 형이상학적인 이해 자체가 불가능했으며 따라서 로마교황청에서는 무수한 왜곡이 필요했다.
우상과 징표를 섬겨서는 안되면서도 그들은 십자가를 비롯한 다양한 상징물들과 건축물, 성상 들을 만들어야 했고, 당시 보편적인 대모신을 섬기던 민족이었기에 성모 마리아를 신격화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당연히 동로마교회로부터 압력을 받았지만, 로마 교황청은 멈출 수 없었던 것이고, 정통 기독교 특히, 당시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지금의 레바논 지역까지 교세를 갖고 있었던 '아리우스파 수도회'의 비난은 절정에 이르렀었다.
아리우스 수도회는 로마에서 축출당한후 이슬람의 영향력으로 흘러 들어갔으며, 마호멧이 헤지라라하여 도망다니던 시절에 그를 숨겨주기까지하였다.
이후 아리우스파의 영향으로 이슬람의 코란에 예수가 선지자로 등장한다.
당시 로마 교회 경쟁 상대였던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등 동방의 3대 본산(本山)교회에 로마 교황청은 정통성 마저 위협받게 되었으며, 오래 동안 주도권을 놓고 다투던 콘스탄틴노플의 동방교회와는 성만찬에 쓰는 빵에 누룩 넣는 여부를 놓고 맞부딪쳐 1054년 서로를 파문(破門)함으로써 회랍정교(Greek Orthodox Church)로 알려진 동방교회가 분리되기에 이른다.
1095년,드디어 로마 교황청은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하에 유럽의 왕들과 이해관계를 만들게 되고, 십자군 전쟁은 터지게 되었다.
이 전쟁에는 아무런 명분이 없었다.
무역을 중시하는 아랍인들은 왕래를 통제하거나 박해한적도 없었으며, 어떤 종교에도 하나님이 있고, 어떤종교를 믿어도 올바르게 살아간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던 무슬램들은 기독교인에게 관대했으며, 기독교의 예수를 그들의 경전인 코란에도 선지자로 받아 들였다.
당시 십자군은 절대로 종교적 이념을 갖는 전사가 아니라 약탈자였고, 학살자 였다.
그들은 이슬람인들에 대해 어린이들과 여자들까지 대학살을 자행했으며, 무슬램만큼이나 '아리우스 수도회'를 따르는 기독교도들이 이단이라는 명목하에 대학살 되었다.
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이유로 많은 숫자의 유대인들도 대학살을 당했다.
원래의 성경에 충실했던 아리우스파는 이렇게 괴멸되어 버리고, 동방교회는 세력을 잃게 되었다.
이방신의 숭배자였던 폭군에게 공인받고, 그에 못지 않은 다른 폭군에 의해서 국교로 공포되고, 성경의 내용과는 어긋나는 삼위일체등이 투표로 결정나고, 기독교의 원죄론을 정립한 자는 실상 로마제국의 아첨꾼이었으며, 이방신의 축제가 섞여버리고, 원래의 성경에 충실하였던 교파가 학살자들에게 대량학살당해서 사라져버리는.......
이것이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어 갔던 숨기고 싶은 역사적 사실들이다.
물론, 마리아숭배, 유아세례, 성화숭배등은 카톨릭에만 국한되는 사항일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사항들은 오늘날의 개신교가 버리지 못한 주요한 교리들인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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