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안티 기독교

가장 기독교다운 것이 가장 종교다원주의 다운 것

하니야다 2010. 3. 2. 00:13

1.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는 마루 종( )에 가르칠 교( )를 사용한다. 이를 풀면 가장 높은 가르침이다. 즉 종교는 우리에게 가장 높고 가장 깊은 가르침이라 하겠다. 높이를 잴 수 없는 하늘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바다를 향한 높은 봉우리들을 우리는 종교라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종교를 묻고 가지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유한한 인간의 무한자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의 한계와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은 신을 찾게 되어있다. 포이에르바하는 이를‘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신이 인간성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인격적인 신을 경계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상황이-고난과 절망과 같은 구원이 필요한 상황, 신을 말하게 금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그리고 신학은 철저하게 인간의 자리에서 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비단 인간의 존재론적 자리뿐만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절박한 현실의 자리에서 더욱 그렇다.
2.다원주의는 무엇인가
구원이 필요한 현실적 상황이 하나가 아닌 여럿이라면 그 물음과 대답 또한 다양할 수 있다. ‘진리를 향한 다양한 길’이것을 종교다원주의라 한다. 이것은 서로간의 현실과 구원적 행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서 서로가 더욱 궁극의 가르침에 가까이 가도록 대화하고 협력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듯이 단순히 ‘모든 종교는 하나이므로 타종교를 받아들여도 된다’는 무분별한 수용적 인식이 다원주의는 아니다. 또 다양한 종교중에서 기독교만이 의롭고 고등종교라는 우월주의 또한 경계해야 한다. 종교다원주의의 원칙은 인정과 존중 그리고 대화이다. 그러나 대화와 협력의 기준은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구원에 충실하고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만약 인간의 구원에 합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는 종교라면 그것은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
3.난점-내가 나를 모른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우리가 종교다원주의를 이야기 할 때 집고 넘어가야 할 물음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과연 기독교의 본질을 얼마만큼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또 ‘그렇다면 기독교안에는 다원적이고 토착화적인 요소는 없느냐?’는 것이다. 먼저 두 번째 물음을 살펴보면 기독교안에는 다분히 다원적이고 토착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족장의 신에서 단일신론 그리고 유일신론으로 변하는 구약에서의 신관의 변천사,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이후의 종교정책과 그 후 왕조의 종교정책 그리고, 부활신앙이나 예언자 개념의 수용.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한 유명한 연설‘내가 전하려는 하나님과 너희가 믿고 있는 신은 다르지 않다’을 통해 우리는 이미 기독교 안에 종교 다원주의적 요소와 토착화 과정이 내포되어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순수한 기독교의 본질을 말할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무엇이 진정한 기독교이고 우리는 그것을 말할 수있어서 타 종교와 대화를 할 수가 있는가?’라는 난점에 부딫힌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변천사가 ‘인간구원’이라는 본질을 잘 표현하기 위한 형식이었다면 우리는 이것을 이해할 수가 있다. 즉 기독교는 하나님의 인간구원이라는 본질이 각 시대와 상황에 맞게 표현되어 온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이 시대와 상황에 맞는 기독교적 내용을 담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기독교안에 이미 다원적이고 토착화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면 기독교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 다원주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기독교적인 것이 가장 다원적인 것이 될 것이다.
4.왜 다원주의를 묻는가?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구원이다. 가장 기독교다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구원받은 자로써의 행위이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나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만이 올바른 실천을 할 수가 있다. 또 올바른 실천이 있어야 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증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 또한 마찬가지이다. 현실적인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노력 없이 내세의 하나님 나라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세의 하나님 나라 도래와 그 실천이 하나님 나라의 시발점인 것이다. 믿음은 구원이 통로이지 구원의 원인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내세적 하나님 나라와 개인적인 은혜에만 치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다운 모습을 잃어가고 불신자들로부터 질타와 비난을 받아왔다(뿐만 아니라 교회 세습 공룡화된 성전 기독인의 비리와 부정과 같은 모습도 보이고 있다.) 기독교의 본질을 담보하지 못하는 이런 안 좋은 모습과 자신들의 토양에 제대로 심겨지지 않고 오히려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에 일조하는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모색하는 제 3세계 신학자들의 행동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5.가장 이상적인 다원주의 모색
인간구원이라는 본래 의미에 맞지 않는 지금의 기독교를 보면서 우리는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이 기독교다운 구원행위임을 알았다. 이것은 타종교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기독교적이면서 다원적인 것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각 종교 간의 가장 다원적인 모습은 현실 속에서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는 비종교적인 상황 속에서 각 종교의 본질에 걸 맞는 구체적 실천과 협력일 것이다. 이것이 각 종교의 본질이며 다원주의의 핵심이다. 각 종교의 원리는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현실적인 구원에서는 서로 협력하는 것 또 현실적 실천에서부터 나오는 각 종교 간의 대화, 이것이 지향해야할 다원적인 모습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얼마 전 있었던 ‘새만금 지키기 기불천 세 종교 성직자의 삼보일배’는 가장 기독교적이고, 가장 불교적인, 그리고 가장 다원적인 모습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도 이라크 파병과 통일 문제, 부익부 빈익빈 현상 등, 함께 모색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더욱더 나의 실천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협력이 필요하다.
6.우리의 자세-다원주의를 통해 돌아본 신학의자세
쉴라이에르마허가 종교론을 집필할 당시 독일은 종교검열 제도가 엄격했다. 사상과 신아이 국가에 의해서, 교권에 의해서 검열을 받았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종교론을 쓰면서 이 검열 때문에 굉장히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는 수사학적인 표현으로-글자 그대로 판독하지 말고 글 속의 저자의 의중을 이해하라. 종교론을 집필하였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교권과 교리가 그리고 종교 정책이 사상을 제한하면 안 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 또한 얼마 전 변선환 교수를 이와 같이 정죄하고 말았다. 그 어떤 것도 사상의 자유를 막을 수 없고 막아선 안 된다. 그 순간 그것은 독단이 되어버린다. 교권과 교리는 우리의 방향점이 되어야지 우리의 사상을 재약하는 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자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우리의 신앙은 항상 견고한 성과 같은 보수주의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사상은 이런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하기위해 진보보다 더욱 진보여야 한다. 검열 앞에서도 자신의 사상을 피력한 200년 전의 쉴라이에르 마허처럼 우리 또한 사상의 날개를 마음 껏 펼쳐야 한다. 신앙은 견고하고 뜨겁게 그러나 신학은 냉철하고 열린 마음으로 해야겠다.